8월 15일은 사귄지 2년이 되는 기념일이다. 특별한 것을 해보고 싶었다. 더 정확히는, 기념일이라는 핑계로 상류층의 삶-지금 생각하면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유치한 생각이지만-에 잠시 편입해서 즐기고 싶었다. 마침 운 좋게도, 지인이 워커힐 호텔 멤버쉽 카드를 빌려줬다. 워커힐 '키친' 레스토랑에서 계산시 멤버쉽 카드가 있으면 50% 디스카운트된다는 정보와 함께.
장소를 비밀로 하고 잔뜩 기대하게 해 놓고 찾아갔다. 정장을 입은 직원들에, 냉난방 요금이 걱정될 정도로 훤칠하게 높은 천장, 큰 창문들을 통해 보이는 한강의 야경. 재미있었다. 와~ 이걸 다 즐기고 50%만 내면 된다는 거지! 하는 생각에 평소보다 더 들떴는지도.
1인 15만원인 Taste of Kitchen과 13만원인 Kitchen Classic 을 주문했다. Taste of Kitchen의 스테이크가 더 좋았지만, 중간 메뉴인 전복이 싫어서.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스테이크를 제외하고는 Classic 이 훨씬 좋았다는 거.
평소와는 달리, 웃고 얘기하면서 한시간 반에 걸쳐 천천히 음식을 먹었다. 배를 채운다는 느낌보다는 눈을 호강시킨다는 느낌이 훨씬 강했다. 혀가 그리 예민하지 않아서 얼마나 재료가 좋은지, 싱싱한지는 잘 모르겠더라고. 그냥 좋겠거니 했지.
그리고 슬슬 집에 가려고 계산을 하려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신용카드와 멤버쉽 카드의 성명이 일치하지 않아서 본인 확인이 필요하단다. 멤버쉽을 지인들과 돌려쓰는 문제가 왕왕 발생해서 엄격하게 검사를 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순간 내 얼굴을 스쳐간 당황한 표정을 놓쳤을 리가 없는데도, 직원분은 내가 멤버쉽 카드 주인임을 믿는 태도를 고수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도 정말 민망하고 민망한 상황이었지만, 키친을 높이 평가하게 된 순간이기도 하다. 아무튼, 전혀 생각도 못한 상황이라, 피가 확 얼굴로 몰리는 느낌을 받으면서, 내 것이 맞다고 하기는 했는데,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냔 말이지. 자기 꺼라는데, 신분증도 없어, 자기 폰번호도 몰라, 가입시 집주소도 몰라. 처음에는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은 지인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계속 나한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직원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건 왠 희극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은 그걸 모두 망치고 있는 거잖아.
직원에게 티나는 거짓말해서 죄송하다고 하고, 먹은 거 다 결제하고 나왔다. 나오는 길에 그 직원이 자기 명함이 마침 다 떨어졌다면서 펜으로 이름과 직급을 적은 쪽지를 영수증과 함께 줬다. 즐거운 시간을 망쳐서 죄송하다면서 다음 번에 방문하면 꼭 자기를 찾아달라고 두번세번 당부하면서. 굉장히 유쾌한 순간이었다. 물론 카드값 나오면 속이 좀 상할 것 같긴 했지만.
집에 오는 길에도 계속 웃음이 나왔다. 그간 내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내 소비 패턴에 대한 반성도 함께 했다. 문화를 사는 것을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행위라고 치부했던 나를 반성했다. 문화를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고, 그래서 지갑은 가벼워졌지만, 굉장히 행복했다.